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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노트/떠오르는대로

사수 없는 회사

by 제이캣 2022.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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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기획자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사수 없는 회사'에서 일하는 기획자들을 참 많이 본다. 기업에서 개발자들 위주로 채용하고 기획자는 최대한 덜 뽑으려는 업계의 흐름에 따라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마케팅 업계와 IT업계 통틀어 9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며 사수가 없는 회사와 있는 회사를 모두 다녀보녀 느낀 점은 사수 없는 회사도 (좋다고는 말 할 순 없지만) '다녀볼만 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사수 있는 회사'보다 좋을 수도 있다. 전제조건은 '6개월~1년 정도 스스로 부딪히며 배워볼 마음을 먹었다면'이다.(그런데 이것은 사수가 있어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실 '좋은' 사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여기서 '좋은'이란 실력, 인성적인 면을 모두 말하는데 이 둘을 갖춘 사람을 10년이 가까운 시간동안 만나본 적이 없다.

 

 

실력이 있었던 사수는 한 분있었는데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회사에서 만났다. 그녀(이분을 앞으로 A라고 지칭하겠다)는 남편과 함께 회사를 창업한 분이었다. 작은 회사였지만 임원급(?)이었던 그녀는 디자인을 제외한 실무의 모든 영역을 주관하고 있었고 강의와 집필활동도 하면서 클라이언트에게 회사의 입지를 다지곤 했던 대단한 분이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일을 혼자 감당해서였을까. 히스테리가 너무나도 심했다. 그당시 나는 신입이어서 부족한 면이 정말 많았었는데 실수를 할 때마다 폭언과 고성이 오갔다. A의 고성과 화난 표정이 출근할 때마다 오버랩되면서 출근을 할 때에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일요일저녁이 되면 심한 우울감에 빠졌다. 오죽하면 디자이너선배도 '너가 일에 질릴까봐 걱정된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 회사를 퇴사하고나서도 한동안은 A의 고성이 환청처럼 들렸고 6년간은 그 회사 생각이 나는 순간이면 마음이 울적해졌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A는 본인의 실력도 있으면서 나의 실력향상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저런 과제도 주셨던 유일한 분이었다. 물론 너무나도 스트레스 받는 환경이라 제대로 습득할 순 없었지만...

 

첫회사에서 쓰라린 경험을 겪은 이후로 간 회사들에서는 표면상 사수가 있었지만 팀장, 관리자, 선배의 역할을 하는정도였지 사수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중에서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도 있었지만 후배의 아이디어를 갈취하는 사람, 은근슬쩍 일을 미루는 사람, 마케팅업계에 있으면서도 1년이 넘는 시간동안 단 한번도 아이디어를 낸 적이 없는 사람 등 연차만 쌓인듯한 분들을 많이 봤다. 이런 사람들이 사수의 자리에 앉아있는 경우 사수가 없으니만 못하다.

 

그렇게 제대로 된 사수를 만나지 못하고 연차가 쌓이면서 필요한 것은 혼자 찾거나 공부해서 해결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가 서비스기획자로 분야를 바꾸면서 사수 없는 환경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을 시작하며 다른 기획자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것은 모두 사수 없는 환경에 대해 불만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다. 이해한다. 맨땅에 헤딩하며 일을 배우는 것은 정말 답답하다. 하지만 답답해하기 전!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길 바란다.

 

 

그 사수가 왜 당신에게 좋은 사수여야 하는가?

 

.... 도대체 왜?

 

그 사수는 당신에게 좋은 사수가 될 이유가 없다. 설령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들을 설명하겠다.

 

1. 너무 바쁘다.

 

정상적인 회사라면 당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은 일이 정말 많을 것이고, 사수도 쉴새없이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사수는 당신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줄 시간이 있을까? 아마 그 시간에 업무의 완성도를 높이고 실적을 높이는 데에 집중하고 싶지 않을까. (A의 경우도 일이 정말 많이 바빠서 자신이 원하는 만큼 날 가르치지 못했다. 나에게 자신이 신문 스크랩을 한 것을 오려준 뒤 분석을 시키고 그것을 매일 읽어보고 코멘트 해준 것이 정기적으로 한 일의 전부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정말 많이 알려준 것이었다.)

 

2. 당신은 사수의 잠재적 경쟁자이다(이 부분은 케이스바이케이스다.)

 

당신의 실력이 너무 올라가버리면 조직 내에서 사수의 입지가 좁아질 수도 있다. 이 경우 사수가 자신이 깨달은 노하우를 후배에게 공유하고 싶을까? 물론 자신이 알려줄 책임이 있는 표면적인 정보는 잘 알려줄 수도 있다. (고객의 성향, 회사에서 선호하는 업무 프로세스 등)

 

3. 사수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는 사수의 피와 땀으로 얻어낸 것이다

 

당신이 수년간 고생해서 터득한 업무노하우가 있다고 치자. 그것을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연으로만 남을 수 있는 후배에게 알려주고 싶은가? 화장실에 들어가 울기도 하고 상사에게 쓴소리도 들어가고 많은 공부를 통해 얻은 노하우가 있다면 연고도 없는 후배에게 알려주고 싶을까? 물론 회사에서 보상을 확실히 해준다면 알려줄 수도 있다.

 

4. 사수와 당신의 눈높이는 다르다

 

정말 천사사수를 만나서 사수가 당신에게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치자. 당신은 그 사수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No다! 그 사수가 그 바닥에서 오래 구르고 많은 고심끝에 얻은 지식일수록 당신은 그것을 당신것으로 만들기 힘들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사수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도 힘들 뿐더러 사수가 당신에게 소중한 것을 알려줘도 당신은 그것의 귀중함을 못알아보고 하찮게 여길 수도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현실이 너무 냉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내가 혼자 다 헤쳐나가라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하지만 우리가 사수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으며 혼자서도 충분히 습득할 수 있다. 잊지마시라. 사수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것을.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배우는 것도 아니면서 생색을 듣고 인격모독을 당하고 굽신거리기에는 우리의 청춘이 아깝다. 우리의 '판'을 멋지게 한번 개척해보자. 회사 내에서 내가 시스템을 만들고 나 아니면 돌아가지 않는 판을 만들어보는 것도 짜릿하다.

 

 

 

 

그렇다면 어쩌다 '사수 없는 회사'에 다니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1. 온라인 자료/커뮤니티를 활용한다

 

구글에 기획 관련 정보를 검색하다보면 괜찮은 정보를 담은 블로그나 사이트가 꽤 나온다. 그런 사이트를 '랜선사수'로 삼고 커뮤니티에 일할 때 막히는 부분들을 과감하게 질문해보자. 실제 사수보다 괜찮은 사람들이 꽤 많다.

 

2. 자기개발을 게을리하지 말자.

 

사수가 없는 만큼 더 자기개발을 하자.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서비스기획은 트렌드에 대한 민감함과 IT상식이 필수인 분야다.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금방 티가 나며 순식간에 후배보다도 도태되는 것이 이쪽업계의 특성이다. 자기개발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훗날 포스팅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이유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나에 대해 굉장히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나는 관계지향적인 사람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괜찮은 '사수'는 못 만났지만 괜찮은 '사람'은 많이 만났다. 그들과 함께 하면서 사회와 인생을 많이 배웠다. 내 인생계획을 세움에 있어서 부분적인 롤모델이 된 분들도 다섯 분이나 있다. 또 선배들을 관찰하며 많은 노하우를 얻었다. 이를테면 조직에서 자신의 입지를 어떻게 굳히는지, 자신을 썩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지 등.. 많은 것을 배웠다. 말그대로 '사회생활 (社會生活: 사람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집단적으로 모여서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공동생활)을 한 셈이다. 그 안에서는 눈물도 있었지만 깨달음도 있었다.

 

직장은 사회생활을 하는 곳이다. 실력을 쌓을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먼저 '사회생활'하는 곳이다. 실력은 조용한 곳에서 은밀히 쌓고 '사회생활'하는 곳에 가서 보여주자.

 

오늘도 맨땅에 헤딩하고 있을 사회초년생분들을 격하게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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